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르빈 롬멜/평가 (문단 편집) === "총통께서는 내게 아주 분명하게 명령하셨네." === >롬멜에겐 야망이 있었다. 1943~44년까지 그는 '''의식적으로 총통의 신뢰를 강조한 '총통의 원수(Führer's Marshal)''''였다. 롬멜은 아프리카의 참패에 자존심이 매우 상했고 파리로 이동하는 몇 시간 동안 줄곧 나에게 OKW에 대한 불만과 실망감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총통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1944년 봄, 그는 서부전선에서의 승리로 자신의 명성을 회복하길 바랐다. 그러나 롬멜은 자신의 생각과 맞아떨어질 때만 룬트슈테트의 명령을 따랐다. '''그는 원한다면 언제든지 히틀러에게 의지할 수 있었다. 롬멜은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총통께서는 내게 아주 분명하게 명령하셨네." 이 말은 서부전선 총사령부에 대한 압력을 의미했다.''' 그는 결코 룬트슈테트에게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나와 참모들을 통해서 이를 전했다. > ---- > FMS B-308, 에서 서부전선 총사령부 참모장 귄터 블루멘트리트 보병대장의 기록 롬멜 옹호론자들과 롬멜 신화는 '정치적 야심과는 무관한 순수 군인'이라는 전제를 고집하기 때문에 '''롬멜이 얼마나 히틀러와 사적으로 친했고 히틀러의 권위를 이용했는지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분명 롬멜이 1943년 북아프리카에서의 패전과 1944년 서부전선 패배를 겪으면서 히틀러에 대해서 굉장히 회의적으로 변하고 있었던 것은 맞지만 '''그 이전까지 1934년 국방군 장교단의 충성 맹세 시점부터 1944년 서부전선 개전 이전까지 여전히 롬멜이 여느 독일인이 그렇듯이 히틀러를 추종하였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롬멜을 옹호하기 위해 '주코프와 맥아더가 롬멜보다 몇 배는 더 독선적이며 패튼은 아이젠하워가 뒤를 봐준 건데 왜 롬멜한테만 엄격하냐'며 전형적인 [[양비론]]을 편다. 그러나 몇 배 더 독선적인 기준이란 건 따로 없으며 위의 기록과 비교하여 주코프, 맥아더, 패튼이 ''''자국 최고 지도자의 권위를 빌려서 총사령관과 참모들을 압박'''한 적도 없다.--주코프가 그랬으면 당장 숙청됐을 거다.-- 주코프는 스탈린의 권위를 빌린 적은 있으나 최소한 그것으로 자신의 상관을 압박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주코프는 스탈린을 효과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애초에 주코프는 명목상 총사령 대리, 즉 상관이 스탈린 뿐이었고 군 내에선 실질적인 소련군 총사령관이었다. 사적으로 불화가 있는 건 문제되지 않는다. 이를 가지고 히틀러의 권위까지 동원하며 수십만 장병의 목숨이 달린 총사령부의 지휘 체계를 뒤흔들어놓았기 때문에 비판을 받는 것이다. 위의 보고서의 제목을 보면, 얼마나 당시 서부전선 총사령부의 지휘관들 간에 알력이 심했는지 미군은 전후에 이를 따로 분석하는 기록까지 남겨둘 정도였다. 요아힘 루데비크 교수는 자신의 저서 에서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그저 살아남기 위해 싸웠다고 분석했다. 롬멜이 히틀러를 방패 삼아 서부전선 총사령부에 간섭한 대가는 독일군 장병들의 사상자 수로 치러야 했다.[* 물론 서부전선에서의 독일군의 고전이 순수히 롬멜의 잘못은 아니었다. 롬멜이 주역이었던 국방군 서부전선 총사령부의 갈등, 연합군의 압도적인 전력이 시너지를 내었고 이후 팔레즈에서 히틀러가 후퇴를 해야할때 공격을 명하면서 7만명의 정예병이 통째로 날라갔던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